“그림 한 장에 담긴 꿈 – 아무도 몰라도, 나는 그렸기에 존재한다 《Waiting for Hockney》"
🎨 개요: 집착인가 예술인가 – ‘Waiting for Hockney’가 그리는 천재와 광기의 경계
*《Waiting for Hockney》*는 전통적인 예술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비껴가며, 예술에 대한 신념과 광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좌절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깊이 있게 파고든 작품이다. 줄리 체코웨이(Julie Checkoway) 감독은, 미국 메릴랜드의 무명 화가 **빌리 파파스(Billy Pappas)**가 8년 5개월에 걸쳐 한 장의 마릴린 먼로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을 따라가며,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시작은 ‘세계적인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에게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보여주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이 여정은 단지 유명 화가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보가 아닌, 자기 확신이 외부의 인정과 충돌하는 철학적 긴장을 담은 여정이다.
빌리는 자신을 “세상의 모든 머리카락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는 고배율 확대경과 정밀한 연필 묘사를 통해, 마릴린 먼로의 한 장의 흑백 사진을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이미지로 전환하려 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기술적 재현'이 아니라, 실제보다 더 정밀한 현실을 창조하려는 인간 욕망의 시각화다.
감독은 빌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주변 인물들의 관찰을 통해 그를 과대망상적인 인물로 단정짓지 않는다. 대신, 그의 집요함, 고립, 강박적 작업 방식을 따라가며,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그의 주변 인물들—가족, 후원자, 큐레이터—는 응원하면서도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그의 작업은 점점 신화화되며 종교적 숭배에 가까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독특한 점은, **'결말의 비틀림'**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결국 빌리의 그림을 본다. 그리고 *“놀라운 기술”*이라 평하면서도, *“여전히 사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재현일 뿐”*이라는 단호한 의견을 내놓는다. 이는 빌리에게 일종의 충격이며, 동시에 관객에게도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예술이 되는가?”, **“창의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다.
결국 이 영화는 호크니의 평가보다도,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천착한다. 빌리는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바텐더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좌절'이 아닌 *“내가 했다는 자부심”*이 남는다.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여전히 믿고 있다. 이것은 예술의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는 진술이다.
📖 줄거리: 한 장의 얼굴, 끝없는 기다림 – 천재의 꿈과 현실의 간극
영화 *《Waiting for Hockney》*는 빌리 파파스라는 무명 화가의 여덟 해에 걸친 작업 여정을 따라간다. 단 하나의 목적, “데이비드 호크니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는 것.” 단 하나의 작품, “마릴린 먼로의 초상화.” 이 단순한 목표는 영화가 흘러가며 현대 예술의 본질, 창조의 의미, 집착과 신념의 간극을 끊임없이 묻는 복합적인 탐색으로 확장된다.
이야기는 빌리의 어린 시절 배경에서 출발한다. 그는 메릴랜드의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미술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았지만, 비범한 손의 감각을 지녔던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그의 후원자 패티는 그를 "현대 예술계의 고흐"로 비유하며, 자신의 모든 돈과 정서를 빌리의 예술에 쏟아붓는다. 이 관계는 단순한 후원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구원'**을 추구하는 일종의 상호 의존적 신념 공동체로 읽힌다.
빌리는 자신이 고안한 ‘확대된 관찰법’을 통해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픽셀 단위로 분해한 후, 이를 초정밀 묘사로 다시 구축해낸다. 이 과정은 그 자체로 8년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반복되고, 수 천 개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그려내는 고통의 시간으로 기록된다. 그는 이를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이, 그는 가족과의 거리감, 사회적 고립, 정서적 불안정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며,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 ‘창조의 집착’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주변 사람들은 처음에는 지지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걱정과 회의로 돌아선다. “그 그림 하나로 뭘 하겠다는 거야?”, “왜 그걸 8년이나 했어?”라는 질문은 곧 관객의 질문이 된다.
중반부에 접어들며, 빌리는 마침내 호크니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는 수많은 관계자를 통해 소개를 시도하고, 영국으로 날아가며, 자신의 그림을 담은 거대한 상자를 지고 런던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 여정은 단지 예술가의 네트워킹 시도가 아니라, 신에게 헌화를 바치려는 성자의 의식처럼 묘사된다. 이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종교적 숭배의 시선과 맹목적 믿음의 허상을 동시에 담아낸다.
클라이맥스에서, 호크니는 빌리의 그림을 본다. 그의 반응은 차갑지 않지만, *“훌륭한 기술이지만,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한 마디는, 8년간의 신념을 송두리째 흔든다. 빌리는 실망하지만, 동시에 예술의 의미가 타인의 인정이 아님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예전처럼 바텐더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림은 멈추지 않는다. 이는 “예술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존재의 증명”이라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전달하는 장면이다.
🪞 챕터 1: 도입 – 신념의 씨앗과 ‘예술가’로의 자기규정
영화의 초반부는 빌리 파파스라는 인물이 단순한 ‘재능 있는 무명 화가’가 아니라, 자기 신념으로 무장한 독립적 창조자로 자신을 설정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 도입부는 예술이라는 개념의 출발점—즉, ‘나는 왜 예술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빌리의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 자기 확신의 기원: 고립과 신념의 결합
빌리는 메릴랜드의 소도시에서 평범한 노동 계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학문적 엘리트나 미술 학교 출신이 아니며, 오히려 **“나는 스스로를 가르쳤다”**는 말에서 보듯, 자기 학습과 관찰에 의존해 온 인물이다. 이 같은 ‘비제도권적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은, 그가 주류 미술계와 자신을 철저히 구분 짓는 초석이 된다.
그의 말 중 가장 상징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머리카락을 그릴 수 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자부심이 아니라, 기술적 정확성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믿는 철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믿음은 동시에 타인의 시선이나 예술계 담론과는 단절된 자기 세계 속의 정의이기도 하다. 이는 훗날 호크니의 냉정한 피드백과 충돌하는 서사적 복선을 형성한다.
🎯 주체로서의 ‘예술가’ 선언: 나는 예술가다
초반의 또 다른 핵심 장면은, 빌리가 후원자인 패티에게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예술은 *“빛의 해석”, “현실의 초월”*이라며,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보다 더 섬세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이 과정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이 ‘신의 피조물보다 더 완전한 인간의 손’을 꿈꾸던 그 시기의 집착과 닮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예술이 결과 중심이 아니라, 과정 중심의 수행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림을 완성하는 8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기간 내내, 자신이 선택한 방식과 원칙을 관철시키는 데만 집중한다. 이 태도는 영화 내내 관통하는 메시지, 즉 **“예술가란 스스로 예술가임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라는 명제의 출발점이 된다.
🧩 상징적 전개: 확대경, 머리카락, 시간
이 도입부의 가장 중요한 시청각적 장치는 확대경을 통해 바라본 마릴린의 사진 속 머리카락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테마를 시각적으로 응축한 메타포다. 확대경은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욕망’이며, 머리카락은 ‘무의미해 보이지만 반복되는 구조물’, 그리고 그 묘사는 ‘고통스럽지만 완전함을 향한 반복’이다.
즉, 이 시퀀스는 빌리의 삶이 단지 “유명한 화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담보로 하는 철학적 실험임을 관객에게 암시한다.
⚔️ 챕터 2: 충돌 – 예술과 인정 욕망의 교차점
중반부에 접어든 *《Waiting for Hockney》*는 빌리 파파스의 내면이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구간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확신의 닫힌 구조 안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이라는 행위가 외부 세계와 어떻게 소통되는지를 실험하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이 과정은 단순히 유명 화가와의 만남을 위한 여정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기를 구성해온 신념 체계와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 밖으로 나간 예술 – 신화화된 자신과의 거리두기
이 챕터의 핵심은 빌리가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보여줄 준비’를 하게 되는 전환점이다. 그는 패티의 권유와 자신의 확신 속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를 만날 준비를 하며, 그림을 이동할 전용 케이스를 준비하고, 전시 전략을 고민한다. 그러나 이 준비 과정은 예술의 본질이라기보다는 ‘판매와 납득’을 위한 마케팅 행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요. 하지만 호크니라면 다를 거예요.”
이 말은 곧 그가 예술을 향한 자기 확신을 완전히 외부 인정에 위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즉, 그는 진심으로 호크니가 자신의 예술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면서도, 그 인정이 곧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할 마지막 열쇠라고 믿는다. 이는 자의식으로부터 자율적이었던 예술이 점점 타자 중심으로 이동하는 서사적 위기를 예고한다.
🛩️ 호크니를 찾아가는 여정 – 헌신인가 맹목인가
빌리는 결국 영국으로 떠난다. 이 여정은 단순한 ‘그림 전달’의 절차가 아니라, 그의 예술 세계가 외부 세계와 첫 직접 접촉을 시도하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그가 런던 골목을 헤매고, 그림 상자를 들고 미술관을 방문하고, 전화번호부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상세히 따라간다.
이 장면들은 마치 **현대판 ‘돈키호테’**처럼 묘사된다. 자기 신념을 현실에 투사하는 순수한 인물, 그러나 그 순수성은 세상의 냉정함과 충돌하며 점차 의문으로 바뀐다. 감독은 빌리의 모습을 판단하지 않고 담담히 담아내지만, 관객은 점차 **“이건 예술에 대한 믿음인가, 아니면 맹목적 자기 투영인가”**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
🧊 호크니의 평가 – 기술과 예술의 간극
가장 결정적인 충돌은, 호크니가 그의 작품을 보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호크니는 빌리의 그림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밀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여전히 사진에 갇혀 있어. 회화는 그것을 넘어서야 해.”
이 대사는 빌리에게 충격이다. 8년 5개월을 바쳐 만든 작품이 기술적 모사로만 분류되고, 예술적 창의성이나 메시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이 장면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영화의 중심 질문을 관객 앞에 던진다. 빌리는 회화가 사진보다 더 깊은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호크니는 그것이 단지 “복제”일 뿐이라고 본다.
이 순간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자기 신념이 외부 권위에 의해 부정되는 체험이며, 이는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처음으로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계기가 된다.
🌀 심리적 충격과 관객의 혼란
이 장면 이후, 영화는 빌리의 반응을 길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그림을 다시 싸고, 카메라 앞에 서서 짧게 말한다:
“나는 여전히 내가 맞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새로운 걸 했어요.”
이 대사는 그가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논리를 버리지 않으려는 고집, 혹은 생존 방식이다. 여기서 영화는 진정한 예술은 자기 확신과 외부 인정을 어떻게 균형 잡느냐에 달려 있다는 주제 의식을 고조시킨다.
🌅 챕터 3: 절정 – 좌절 이후의 재정의와 예술의 자율성
호크니로부터의 평가 이후, 영화는 빠르게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순간부터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다. 바로 예술이라는 신념이 타인의 인정 없이도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그리고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원점 회귀의 여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 실망의 수용 – 정체성의 재조립
호크니와의 만남 이후, 빌리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영국에서의 실패는 단지 상징적 만남의 좌절이 아니라, 8년 이상의 노력이 외부로부터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실존적 충격이다. 그는 후원자 패티와 재회하며, 짧게 말한다:
“그는 놀라긴 했지만, 나를 보지 않았어. 그림만 봤지.”
이 말은 빌리가 예술을 기술로 증명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복합적인 심정을 내포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곧바로 절망으로 전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순간부터 그는 예술의 의미를 ‘외부 평가’에서 ‘내적 충실성’으로 재정의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 일상의 복귀 – 예술과 생계의 병존
빌리는 다시 바텐더로 돌아가고,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예전 같으면 이 모습은 ‘패배자’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오히려 이 구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는다.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이제는 대중과의 접점을 탐색하는 예술 활동도 시도한다.
카메라는 그가 조용히 연필을 들고 다시 머리카락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예술은 멈추지 않았으며, 예술가는 스스로의 신념 안에서 계속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그가 “좌절 이후에도 창작을 지속하는 자”임을 인정하게 되며, 패배가 아닌 자율의 선언으로 전환된다.
💡 예술의 새로운 정의 – 실패를 껴안는 힘
감독은 이 절정 파트에서 빌리의 실패를 아름답게 정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실패를 예술의 한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호크니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창작자로 자리매김한다.
이 시점에서 영화는 철학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예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정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그 행위 자체로 자족할 수 있는가?”
빌리는 자신의 실패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실패 속에서 새로운 확신을 발견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새로운 걸 했고, 나는 그것을 완성했다. 그것으로 충분해.”
이 말은 영화가 내내 구축해온 갈등 구조—기술 vs 창의성, 자의식 vs 타자 인식, 집착 vs 열정—을 통합하는 결론으로 기능하며, 예술은 결국 자신이 정의하는 것이라는 자율적 명제를 강화한다.
🖋️ 총평 – 창작과 존재에 대한 시적 탐구
*《Waiting for Hockney》*는 단순한 예술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왜 창작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는 한 인간의 시적 여정이며, 창작 행위의 고독과 희망, 실패와 지속성에 대한 탐구다. 줄리 체코웨이 감독은 빌리 파파스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예술에 자신을 걸 때 어떤 불가능과 가능성이 발생하는지를 섬세하게 조망한다.
🎬 연출 – 거리두기와 공감 사이의 시선
줄리 체코웨이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가장 이상적인 연출을 구현한다.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되, 관객이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방식이다. 카메라는 빌리의 집착을 찬미하지도, 조롱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의 가족, 친구, 후원자, 그리고 호크니의 반응을 통해 복합적인 인물상을 구축하며, 관객이 빌리의 ‘신념과 맹목’ 사이를 스스로 측량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영화 전체에 철학적 유보와 감정적 여백을 남기며, 다큐멘터리가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서 존재론적 명상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 주제 – 예술이란 무엇인가?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호크니의 말과 빌리의 반응 사이에서 생성된다. “이건 그냥 기술적인 재현일 뿐”이라는 평가는, 예술이란 단순히 ‘정확함’이나 ‘노력의 양’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메시지는 빌리의 반응에 담긴다. 그는 무너지지 않고,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즉,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예술이란, 타인의 인정을 넘어서는 자기 존재의 증명이다.”
이는 현대 사회가 끊임없이 평가와 성공에 매몰되는 시대에, 예술을 통해 존재를 회복하는 한 인간의 저항이며, 비평적 예술론을 일상으로 끌어내린 실천적 선언이다.
🧠 인물 – 빌리 파파스의 상징성
빌리는 실존적 아이콘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이지만,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한 인물이며, 실패했지만 멈추지 않은 인간이다. 그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반 고흐, 헨리 다거와 같은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과 유사한 상징성을 획득한다.
그의 정밀 묘사 기술은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 집요한 삶의 태도이자 세계를 응시하는 방식으로 기능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당신은 무엇에 집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되묻게 한다.
🌍 예술 다큐멘터리로서의 위치
*《Waiting for Hockney》*는 전통적인 예술 다큐와 달리 ‘예술 그 자체’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예술이 한 인간의 인생을 어떻게 형성하고 파괴하며, 다시 회복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 , 등과 함께 예술가의 집념과 인간의 상처를 동시에 조명한 명작 다큐로 손꼽힐 수 있다.